이슬람을 바로알자1 [이만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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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을 바로알자 1


 이만석 목사

 1. 이슬람을 보는 균형잡힌 시각

다문화 평화 공존이라는 대전제

대한민국은 예로부터 스스로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고 널리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을 민족정신으로 표방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아시아 대륙의 오른 쪽 끝에 혹처럼 불거져 나온듯한 좁은 땅 덩어리에 살아와서 그런지 아니면 대원군의 쇄국정책 정신이 아직도 남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외국인들에 대한 편견이 실존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유구한 역사를 통해서 단일민족으로 살아온 탓에 밀려들어오는 외국인들과 섞여 살아야 하는 갑작스런 변화에 어색해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스컴과 인권운동가들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한 적극적인 다문화 홍보 캠페인과 함께 외국인들에 대한 편견을 줄이기 위한 정부 차원에서의 법과 제도적 보완 덕분에 외국인들에 대한 고까운 시선이 많이 줄어들고 있다. 이제 외국인 신부를 맞이하는 가정들이 늘어나고 있고 길거리에서 외국인들을 만나도 특이한 경우가 아니면 별로 이상한 눈길을 주지도 않는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을 뿐이며 그것이 틀렸다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사회 통념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은 다문화 정책이 한국에 조용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사회 통합이라는 대전제를 생각하면 일면 다행스런 현상으로 보인다.

 

다문화 정책의 문제점

 

하지만 우리보다 먼저 이런 현상을 경험했던 유럽의 변화를 볼 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문제가 여기에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이슬람의 문제다. 세계 3대 여성정치인 중 한 명으로 주목받고 있는 독일의 안젤라 메르켈 총리는 이슬람 때문에 다문화 정책은 철저히 실패했다. 그들은 우리의 것을 존중하지도 않고 우리와 동화되려고 하지도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미 이슬람 율법으로 재판하는 샤리아 법정을 85개나 운영하고 있는 영국의 데이빗 캐머런 총리는 우리가 이슬람을 보호해주는 동안 그들은 우리 안에서 원리주의를 키우고 있었다.”고 말했다. 유럽에서 가장 많은 10%에 달하는 무슬림 인구를 자랑하는 프랑스의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우리가 이슬람을 지나치게 보호해 주다 보니 우리의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개탄하며 뒤늦게 무슬림 여성들의 부르카 착용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벌금을 부과시키는 등 소위 이슬람 때리기정책을 추진하다가 결국은 재선에 실패하여 대통령직을 내어주고 말았다. 스위스에서는 이슬람 사원의 첨탑 건설을 금지시키는 법을 국민투표를 통해서 통과시켰고 호주에서도 다문화정책 포기를 선언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유럽은 분명 이슬람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유럽 사람들이 우리보다 생각이 모자라서 혹은 포용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유럽 문화를 한 마디로 똘레랑스(관용) 문화라고 표현한다. 이는 모든 사람이 최대한의 자유와 인권을 누리며 각기 자신의 문화를 완벽하게 즐길 수 있도록 허용하고 보호해 주는 문화다. 유럽인들은 무슬림들을 선대하고 자신들과 똑같은 권리를 제공하고 자신들의 특권을 양보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우선권을 부여해주면 그들도 고맙게 생각하고 사회에 자발적으로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2001년 뉴욕 행 출근용 비행기를 납치해 세계 무역센터를 들이받아 3000 여명이 살해된 9/11 테러가 일어나 온 세계가 충격에 빠졌을 때도 유럽 사람들은 우리가 무슬림들에게 최대한의 혜택을 보장해 주었으니 유럽에서는 저런 테러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한 착각이었다. 2004311일 오전 7:30분 출근시간에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의 3개 열차 역에서 대형 폭발물이 터져 약200명이 죽고 2천명이 부상당한 대규모 테러가 일어났다. 그 다음 해인 200577일 오전 840분경 영국 런던의 출근시간에 지하철 3곳에서 동시 폭발테러가 일어났고 잠시 후 런던 도심을 달리던 2층 버스가 폭발하는 테러가 발생하여 도합 2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알 카에다는 이 사건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일으킨 미국을 돕기 위한 군대를 보내 무슬림들을 학살한 유럽에 대한 보복이라고 선언했다.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인가?

크고 작은 규모의 테러가 지구촌 도처에서 무슬림들에 의해서 매일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지도자들은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라고 주장한다. “종교는 강제로 하지 말지니라”(꾸란2:256)는 구절이 꾸란에 있으며 대부분의 이슬람 사원에서는 이 구절이 이슬람을 대표하는 구절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테러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 무지한 광신자들이며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꾸란의 가르침대로 종교를 강요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일부 순진한 인권운동가들이나 이미 자신들과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받은 무슬림들의 표가 필요한 정치인들은 그들의 주장을 열심히 홍보해 준다. 덕분에 충격적인 테러들은 오히려 얼마나 억울했으면 자신의 몸에 폭탄을 감고 자폭하는 끔찍한 일까지 저질렀을까?” “극소수의 테러범들 때문에 도매금으로 비난당하는 무슬림들이 불쌍하다.”는 분위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의 경전 꾸란은 결코 평화를 가르치고 있지 않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힘이 없을 때는 평화를 표방하다가 메디나로 이주하여 정치적, 군사적 힘이 생겼을 때는 평화를 취소하고 비무슬림들과의 전쟁을 명했고, 이를 거부하며 그들을 친구로 삼는 무슬림들을 위선자로 분류하여 무서운 징계를 명했다.(꾸란3:167, 2:216, 4:138, 4:145)

 

무슬림들은 꾸란을 모른다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꾸란이 7세기 문어체 아랍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매일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해 드리는 무슬림들의 기도도 국적을 불문하고 무조건 아랍어로 드려야 한다. 순진한 사람들은 자국어로 번역해 놓은 꾸란을 읽고 모두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슬람의 위장교리 즉 타끼야(Taqiyya)를 몰라서 하는 말이다. 참고로 꾸란 번역을 한 구절 비교해 보자.

성서의 백성들이여 하나님이 계시한 것을 믿고 그 이전에 너희와 함께 있던 것을 확증하라. 하나님은 그들의 명예를 거두고 그들을 후미로 돌렸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한 자들을 저주했듯 그들을 저주하도다. 하나님의 명령은 항상 수행되노라.(꾸란4:47 최영길역)

오 성서의 백성(유대인,기독교인)들아! 우리가 (,,눈 등이 없는 뒷목처럼 만들어) 얼굴을 없애버려 뒤로 돌려놓거나 안식일을 범한 자들을 저주했던 것처럼 저주하기 전에 우리가 (무함마드에게) 계시한 것 즉 너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확증하는 것을 믿으라. 알라의 명령은 항상 집행되노라.(꾸란4:47 힐럴리 칸 역)

이것을 어떻게 같은 구절을 번역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꾸란을 번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슬람의 율법이지만 꾸란을 번역하고도 징계를 받지 않는 이유는 위장된 번역으로 원래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도록 혹은 이슬람을 좋게 보이도록 미화시켰기 때문이다.

 

무슬림들은 꾸란을 모른다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꾸란이 7세기 문어체 아랍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매일 다섯 번씩 메카를 향해 드리는 무슬림들의 기도도 국적을 불문하고 무조건 아랍어로 드려야 한다. 순진한 사람들은 자국어로 번역해 놓은 꾸란을 읽고 모두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슬람의 위장교리 즉 타끼야(Taqiyya)를 몰라서 하는 말이다. 참고로 꾸란 번역을 한 구절 비교해 보자.

성서의 백성들이여 하나님이 계시한 것을 믿고 그 이전에 너희와 함께 있던 것을 확증하라. 하나님은 그들의 명예를 거두고 그들을 후미로 돌렸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한 자들을 저주했듯 그들을 저주하도다. 하나님의 명령은 항상 수행되노라.(꾸란4:47 최영길역)

오 성서의 백성(유대인,기독교인)들아! 우리가 (,,눈 등이 없는 뒷목처럼 만들어) 얼굴을 없애버려 뒤로 돌려놓거나 안식일을 범한 자들을 저주했던 것처럼 저주하기 전에 우리가 (무함마드에게) 계시한 것 즉 너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확증하는 것을 믿으라. 알라의 명령은 항상 집행되노라.(꾸란4:47 힐럴리 칸 역)

이것을 어떻게 같은 구절을 번역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꾸란을 번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슬람의 율법이지만 꾸란을 번역하고도 징계를 받지 않는 이유는 위장된 번역으로 원래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도록 혹은 이슬람을 좋게 보이도록 미화시켰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신 알라(Allah)

 

이슬람은 알라(Allah)라는 신을 믿는다. 이슬람 홍보요원들은 알라는 신()이라는 일반명사이기 때문에 알라신이라는 말은 신신(神神)이라는 말이므로 잘못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그것도 무식한 문맹자의 주장이 아니라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대학의 교수들이 이슬람 전문가라면서 그렇게 주장하니 보통 사람들은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황당한 주장인지 쉽게 확인해 볼 수 있다.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메신저다는 것이 이슬람의 신앙고백이다. 아랍어로 보면 알라 외에는 일라가 없다(La ilah ela Allah)고 고백하고 있다. 즉 알라(Allah)는 고유명사이고 일라(ilah)는 신()이라는 의미를 가진 일반명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렇게 뻔뻔스러운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이슬람 율법이 타끼야(Taqiyya:위장)를 허락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슬림으로서 이슬람의 유익을 위해서 얼마든지 선의의 거짓말을 활용하여 이슬람의 이미지를 미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들이 하는 거짓말 중에 가장 효과적으로 세계를 속이고 있는 거짓말이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여호와는 같은 신이라는 주장이다. 알라와 여호와는 둘 다 고유명사이다. 각기 다른 이름의 두 신을 어찌 같은 신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물론 아랍권이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지에서는 성경의 하나님을 알라(Allah)로 번역하여 이슬람의 신 알라(Allah)와 동일하다고 오해하기 쉽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명칭의 문제가 아니라 영의 문제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진리는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슬람을 보는 균형 잡힌 시각이라는 것은 보편적으로 이슬람 학자들이 인정하는 견해를 받아들이는 차원으로 이해한다면 곤란한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이슬람의 타끼야(위장) 교리 때문에 절대다수의 학자들이 말하는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는 견해는 검증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도 보면 아합왕이 길르앗 라못을 치러 가면 승리할 수 있는가를 물었을 때 사백명의 선지자가 이구동성으로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의 선지자 미가야는 전쟁에 나가면 왕이 전사하고 군사들은 흩어져 패배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결과는 다수의 주장이 실패하고 미가야의 예언이 적중하여 아합왕은 전사하고 말았다.(왕상22:1-40) 그러므로 진리는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결정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

 

동명이인(同名異人)과 동명이신(同名異神)

 

이름이 같아도 전혀 다른 두 사람을 동명이인(同名異人)이라고 한다. 최영길 박사는 꾸란을 한글로 번역할 때 이슬람의 신 알라(Allah)하나님으로 번역하여 같은 신인 것처럼 혼란을 주었다. 그런데 그가 이슬람 원리와 개론’(무함마드 A. 수하임, 최영길 역, 서울:도서출판 알림,2007)을 번역할 때는 알라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매우 잘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이 과장김 과장은 과장이라는 직함은 같지만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알라 하나님여호와 하나님은 직함은 같지만 고유명사가 다른 것을 볼 때 전혀 다른 존재 즉 동명이신(同名異神)이라는 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번역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혀 다른 신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영을 분별하라.

 

이슬람의 경전 꾸란과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비교해보면 알라와 여호와가 얼마나 다른 신인지 확실히 구별된다.

첫째 성경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전12:3)고 하는데 꾸란에서는 이싸(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자는 이미 믿음에서 떠난 자라’(꾸란5:17)고 주장하고 있다. 이 말씀을 비교해 보면 정 반대의 영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성경은 예수께서 그리스도 즉 구세주 되심을 부인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요일2:22)고 하는데 꾸란에서는 이싸(예수)는 인류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장차 아하마드(무함마드)가 올 것을 미리 알려주기 위해서 왔다’(꾸란61:6)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알라는 거짓말하는 영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하나님께서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기 위해 열어놓으신 유일한 돌파구가 예수의 십자가인데 이슬람에서는 이싸(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추측으로 만든 이야기라고 주장하고 있다.(꾸란4:157)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을 부인하는 것은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악한 영의 역사라는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로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라’(요일2:22)고 말씀하셨는데 꾸란에서는 알라에게 아들이 있다고 하는 자들 때문에 심히 큰 재앙이 있을 것이라’(꾸란19:88-91)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 되심을 부인하는 이슬람의 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섯째로 일부일처를 명하신 여호와 하나님(19:5)과 일부다처를 명한 알라(꾸란4:3)와 어떻게 같은 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여섯째로 이혼을 금하신 여호와(19:6)하나님과 이혼을 두 번까지 허용한 알라(꾸란2:229)는 절대로 같은 신이 아니다.

그 외에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12:19) 원수를 사랑하라’(5:44)고 하신 여호와 하나님과 이슬람을 믿지 않는 이교도들은 어디서 발견하든지 죽여라’(꾸란9:5)고 명한 알라는 절대로 같은 신이 아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18:22)고 하신 하나님과 일흔 번 용서를 구해도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꾸란9:80) 알라는 절대로 같은 신일 수가 없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불변하지만(5:18) 이슬람의 꾸란은 취소할 수도 있고 다른 구절로 대체할 수도 있다’(꾸란2:106)고 하니 어찌 이를 같은 신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여호와를 같은 신이라고 주장하거나 인정하는 것은 제 1계명을 범하는 무서운 죄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무슬림들은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과 무슬림을 혼동하고 있다. 이슬람은 인류 구원을 원천 봉쇄하려는 악한 영의 역사이지만 무슬림은 그 영에 속고 있는 피해자들이며 우리의 형제자매들이며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슬람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들은 9/11 테러에 죽은 사람들도 아니고 이라크에서 참수당한 기독교인들도 아니고 바로 무슬림 형제자매들이다. 어려서부터 거짓 가르침에 속아서 참 구세주를 거부하고 구원의 길에서 스스로 차단당한 채 영원한 멸망의 길을 가면서도 자신들을 이슬람에서 떠나게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원수로 여기며 죽이라(꾸란4:89)는 것이 알라의 뜻이라고 믿고 이를 실천하고자 하는 그들이야말로 이슬람에 의한 가장 큰 피해자들이다.

 

맺는 말

 

이 시대에 살면서 이슬람의 정체를 모르고 속으면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유럽처럼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악한 영의 정체는 확실하게 알아야 하며 그 가르침에 속는 사람이 없도록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영국의 대표적인 무슬림 지도자 안젬 초다리 씨도 이슬람은 지하드를 해야 하기 때문에 평화의 종교라고 말할 수 없다고 시인하는 장면을 유튜브 동영상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저 행복하게 살기 원하는 평범한 우리의 이웃이지만 악한 영의 거짓 가르침에 속고 있을 뿐이다. 비록 꾸란의 가르침에 따라 그들이 우리를 원수로 여길지라도(꾸란5:51, 98:6) 우리는 절대로 그들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이 죄악 중에서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33:11) 그러므로 무슬림들이 어려움을 만났을 때 기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섬기며 도와주되 그들이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인류를 사랑하신 참된 구세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이슬람을 대하는 균형 잡힌 자세이며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라고 생각된다. (다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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